섬세하게 주변의 자기장을 조율하던 손짓이 일단락됐다. 가볍게 내쉰 숨결과 함께 마지막으로 손끝이 향했던 유리 조각에 반사된 빛이 눈동자로 뛰어든 순간, 둔탁해 보이는 헬멧이 기민하게 돌아갔다.

 

 

하늘이 너무 파랬다.

 

 

그 하늘을 수놓고 있는 것이 흰 구름이 아닌 스스로 도화선이 되어 터져 나온 불꽃과 폭발임에, 매그니토는 에릭 렌셔가 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막을 수 있었다. 눈에 비치는 푸른빛에 반사적으로 친구,를 떠올려 버린 남자를 애써 제 속으로 갈무리하며 매그니토는 본격적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이제 곧 눈앞의 건물이 무너져 내리며 피워 올릴 검은 연기와 불길에 하늘 따윈 금세 보이지 않게 될 것이었다.

 

 

 

그건, 그저 그곳에 있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찰스에릭] 멍

잡동사니 2015. 5. 26. 13:15

".....윽"
"에릭?"


더운 숨을 나누며 옅게 땀이 배어나온 허벅지를 틀어쥐는 순간, 애인에게서 비롯한 것이 쾌감이 하나도 섞이지 않은 고통의 전달이라니. 의아해진 찰스가 금세 손을 뗐다. 그리고 뒤이어 흘러나온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톤 낮은 것이었다.


"여기, 어쩌다 이랬어?"


보라, 빨강, 파랑, 초록... 방금 찰스의 손이 닿았던 곳은 매우 화려하게 물들어 있었다. 에릭은 지나간 하루를 머릿속에 굴려봤지만 딱히 답이 될 만한게 보이지 않았다. 평소처럼 훈련을 하고, 그러던 중에 부딪혔나 보지. 여상한 얼굴로 모르겠다고 하는 에릭에게, 찰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누구보다도 뮤턴트들의 안위를 걱정하는 남자가, 제 몸은 왜 돌보지 않는 건지. 자신은 이렇게나 걱정하고 있는데. 안 그래도 잔 상처가 많은 몸에 뭘 또 이런 걸 달고 오는거야. 꽤 넓게 퍼져 있는 멍을 쓸자니 몸을 일으킨 에릭이 조금 미안한 얼굴로 쳐다봐온다. 분명 자신은 아무렇지 않지만 '찰스가 걱정하니까' 저런 표정이라도 짓는 거겠지. 아니나 다를까...


"별 것 아냐. 조금 멍든 것 정도는."


그래, 자신은 찢기고 상처투성이가 되더라도 괜찮겠지. 만약 그게 나였다면 자잘한 생채기 하나도 그냥 넘기지 않았을 거면서. 찰스의 심술이 한 단계 상승했다. 분명히 조금 멍든 것 정도는 별 일 아니라고 했겠다.


여전히 뚱해보이는 찰스를 달래려는듯 에릭이 먼저 키스를 해온다. 평소 친애의 표시로 하는 볼키스도 인색한 편인 그로서는 꽤 적극적이며 애정을 담은 사과의 제스쳐였기에 찰스에게는 제가 에릭에게 약하다는 것을 재확인하게 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한껏 설왕설래하며 기분이 풀리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재개된 몸의 대화에서 에릭을 넘겨 우위를 점하며 찰스는 생각했다.

 

 


다음 날, 아침식사를 마치고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고 나온 에릭은 묘하게 애들이 자신과 시선을 마주치려 하지 않는 것을 느꼈다. 알렉스는 제 얼굴 언저리를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고개를 휙 돌리고 먼저 달려가버렸고, 션은 헉 소리가 나게 놀라더니 안절부절하다 알렉스 뒤를 꽁지가 빠져라 따라 뛰어갔다. 조금 늦게 나온 행크마저 새빨개져선 제 눈을 슬금슬금 피해 가버리니 그냥 넘기기엔 너무나도 이상했다. 그러고 나선 아침 훈련 내내 그 누구와도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딱히 아이들과 친해지려 하진 않았지만 이렇게 대놓고 피하는 것이 좋은 기분일리 없잖은가. 적당히 러닝을 끝낸 뒤 서류와 씨름하느라 나와보지도 못한 찰스가 있을 서재 대신 체력단련실을 찾았다. 한창 근육운동 중이던 레이븐이 에릭 쪽을 돌아보곤 고개를 갸웃하다 흡, 하는 소리와 함께 들고 있던 역기를 떨어뜨릴 뻔했다. 레이븐마저 모두와 비슷한 반응을 보이자 에릭은 눈썹을 한번 그었다.


"왜 그런 표정이지?"
"저, 에릭?"
"알렉스나 션, 행크도 다들 날 보더니 못 볼 걸 봤다는 표정으로 피하더군."
"어, 그러니까..."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레이븐은 조금 난감해졌다. 그 원흉이 제 오빠라는 것이 자명했으므로.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는 레이븐에게 에릭은 간단하게 한마디했다.
"말해."
레이븐은 긴 설명을 덧붙이는 것을 포기했다.
"음, 에릭. 그냥 거울을 봐."
그리고 잠시 후, 서재 쪽으로 달려가는 에릭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찰스? 잠깐 나 좀 보지."
평소와 다름없는 선량한 미소 속에 뭔가 다른 것이 비춰진 것 같은 느낌은, 에릭의 어림짐작만은 아니었으리라.
"왜 그러나 친구."
에릭은 책상 너머로 몸을 숙이며 으르렁댔다.
"이것, 자네 짓이잖아."
"그래. 색도 모양도 딱 보기 좋네만. 별/것/아/닌/ 멍자욱이지."
서슬 퍼렇게 설명을 요구하던 에릭이 푸쉬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물론 그 '멍'은 키스마크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하지만."
"그러니까...자네 말은.."
"아무렇지 않다고 한 건 자네였다네."
어이없다는 얼굴을 한 에릭에게, 찰스는 환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원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몇 개 더 만들어줄 수도 있는데, 어때? 당분간 그 트레이닝복을 입기는 그럴테니 부족한 운동분을 채워야 할 것 아닌가."
"타월이라도 두를 테니 걱정 마."
"오, 이런. 내게서 자네의 목덜미를 훔쳐보는 즐거움을 빼앗을 셈인가?"
"본인이 한 짓 덕분이니 원망 말아."
"멍을 달고 사는 것 같길래 한두 개 늘려준 건데 뭘 그러나."
"자꾸 그러면 나도 만들어 줄 거라고."
계속 이어지던 유치한 공방에 에릭이 최고점을 찍자 찰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양팔을 활짝 벌렸다.
"얼마든지. 그거 아나, 에릭? 그건 내 거라고 도장 찍는 것과 같은 행위라는 걸."
그 대사에 에릭은 입을 벌린 채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사이 책상 옆으로 돌아나와 에릭을 끌어안은 찰스는 제가 만든 키스마크에 입맞췄다.
"내가 남긴 자국을 남들 앞에서 드러내고 다녔다니 뭔가 짜릿한데."
"...kinky..."
"함부로 다쳐오는 자네가 나빠."
투정하듯 말하지만 걱정이 묻어나오는 한마디에 에릭이 눈을 깜박였다. 이런 찰스에겐 아무런 변명도 할 수 없었다.  
"조심할게."
"응."
그래, 에릭. 널 걱정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기억해. 자신을 너무 무모하게 던지지 마. 내가, 옆에 있으니까.

찰스가 에릭을 안은 팔에 힘을 주자 뒤따르듯 두 개의 입술이 포개졌다. 평범한, 자비에 저택의 일상 풍경이었다.

 

 

 

+달달한 두 사람이 보고 싶었다고 한다. (먼바다)


평범하기 그지없던 하루의 흐름이 조금 달라진 것은 그 소포가 배달 된 것에서부터였다. 평소 달콤한 디저트를 즐기는데 일가견이 있는 남매였기에 애용하는 쇼콜라티에숍의 자신작이 집 안에 하나도 남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그것이 온 세상이 초콜릿의 향연으로 뒤덮이는 이맘때쯤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핑크핑크함으로 한층 더 레벨업한 패키지의 박스가 저택에 도착한 것은 마침 누구나 한번쯤 간식을 떠올릴법한 오후 4시 근처였다. 직경 30센티미터 높이 20센티미터 가량의 둥근 박스를 받아든 것은, 하필이면 그 소포가 도착하기 얼마 전 조깅을 하겠다고 나가 저택 주위를 돌아 문 앞에 당도한 에릭이었다. 더없이 소녀틱한 분홍색 상자를 든 에릭이 한창 서류와 씨름하고 있던 저를 찾아 서재에 나타났을 때, 찰스는 에릭이 텔레파스가 아닌 것에 대해 마음속 깊이 감사했다. 더불어 때마침 쇼핑을 나가고 없던 레이븐에게도. 에릭은 제 손에 들린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눈치였고, 그래서 그 순간의 즐거움은 온전히 찰스만의 것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음...찰스? 바쁜데 미안하지만 이걸 자네에게 줘야 할 것 같아서."

 

약간 난처한 듯한 -물론 에릭은 일하는 중인 찰스를 본의 아니게 방해하는 것 같아서였겠지만- 표정의 에릭이 풍성한 핑크 리본으로 장식된 상자를 내밀며 말했을 때, 찰스는 무너지려는 제 얼굴 근육을 다잡기 위해 허벅지를 꼬집어야 했다. 그러는 사이 에릭은 서재를 가로질러 상자를 찰스의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이 집으로 배달된 누군가로부터의 선물이라면 당연히 집 주인의 것이라고 여겨 가져온 것이겠지. 그것으로 제 할 일은 끝났다는 듯 뒤돌아 나가려는 에릭을 찰스가 황급히 만류했다.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기껏 찾아온 이런 이벤트를 놓칠 수야 없었다.

 

"이것, 함께 풀어보고 싶은데. 자네야말로 바쁜가?"

"운동 중이었지만, 잠깐이라면 괜찮아."

 

순순히 방향을 바꿔 책상 옆으로 돌아온 에릭에게 웃어보이고서, 서류 더미를 옆으로 치운 찰스는 상자의 리본을 풀기 시작했다. 뚜껑을 열자 나풀대는 레이스 사이로 갖가지 모양의 초콜릿들이 줄지어 나타났다.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흘리는 찰스를 보며 에릭은 작게 웃었다.

 

"좋은가?"

"물론이지. 이런 선물은 언제든지 환영일세."

"그런 취향인 줄은 몰랐군."

 

놀리는 듯한 멘트를 던진 후 참고하겠네, 라고 덧붙이며 에릭은 주변에 흩어져 있던 리본을 만지작거렸다. 기름한 손가락에 말렸다가 풀어지는 핑크색 리본을 보던 찰스는 그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장면을 곧바로 실천에 옮겼다.

 

"정확히 말하면, 이쪽이 좀 더 취향이야."

 

에릭은 순식간에 제 손목에 묶인 리본과 그윽한 미소를 띠고 있는 찰스를 번갈아 봤다. 몇 번 입술을 달싹이더니 고개를 젓는 모습에 찰스의 미소는 더 깊어졌다. 속으로 뭐라고 하는지 읽지 않아도 훤히 보였다. 이러는 건 다 자네 한정이라고. 오해하면 곤란해.

 

"그럼 이제 맛보게 해주겠어?"

 

제 말이 충분히 유혹적으로 들렸길 기대하며 찰스가 입을 열었다. 살짝 비뚤어졌지만 나름 고운 자태의 리본을 단 손이 상자로 향했다. 한가운데를 장식하고 있던 새빨간 하트 모양의 프랑보아즈 프랄린이 제게 다가오자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초콜릿을 입술 사이로 밀어 넣는 것으로 임무를 다 한 손가락을 따라 나온 혓바닥이 살짝 훔치고 갔다. 분명 눈썹을 살짝 찡그렸을 거야, 생각하며 찰스는 입 안에 안착한 초콜릿의 단 맛과 셀이 부서지며 흘러나온 리큐르의 향을 음미했다. 눈을 뜨자 역시나 미간에 주름이 진 채로 에릭이 쳐다보고 있었다. 핥아진 손가락을 문지르고 있기는 해도, 리본은 풀지 않은 것을 확인한 찰스가 싱긋 웃었다.

 

“최고로 맛있어.”

 

감상에 덧붙여 상자를 눈짓하곤 “하나 더 안 줄 거야?” 묻자 작은 금박 조각을 얹은 트러플이 내밀어졌다. 입술을 오물거리며 만족한 얼굴을 하는 찰스를 보고, 어쩔 수 없다는 듯 에릭도 피식 웃었다. 이번에는 찰스가 직접 한 개 꺼내들었다. 저를 향하는 초콜릿에 에릭은 고개를 저었다.

 

“초콜릿은 좋아하지 않아.”

 

여러 가지로, 라며 먹을 의사 없음을 나타내는 에릭을 보던 찰스는 방향을 돌려 초콜릿을 제 입에 넣었다. 부드러운 크림 가나슈가 혀를 감싸고 녹아내리는 느낌이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이건 다를 걸세.”

 

다시 거절을 표하려는 입술을 어렵지 않게 점령하며, 찰스는 이쪽이 좀 더 달콤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감미로움은, 오래지 않아 입 안에서 온 몸으로 퍼져나갔다.

 

 

 

 

 

+중의적인 느낌의 대사를 치려고 했으나...망한듯.

++찰에 행쇼해...!





다음은 당신이 될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