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윽"
"에릭?"
더운 숨을 나누며 옅게 땀이 배어나온 허벅지를 틀어쥐는 순간, 애인에게서 비롯한 것이 쾌감이 하나도 섞이지 않은 고통의 전달이라니. 의아해진 찰스가 금세 손을 뗐다. 그리고 뒤이어 흘러나온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톤 낮은 것이었다.
"여기, 어쩌다 이랬어?"
보라, 빨강, 파랑, 초록... 방금 찰스의 손이 닿았던 곳은 매우 화려하게 물들어 있었다. 에릭은 지나간 하루를 머릿속에 굴려봤지만 딱히 답이 될 만한게 보이지 않았다. 평소처럼 훈련을 하고, 그러던 중에 부딪혔나 보지. 여상한 얼굴로 모르겠다고 하는 에릭에게, 찰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누구보다도 뮤턴트들의 안위를 걱정하는 남자가, 제 몸은 왜 돌보지 않는 건지. 자신은 이렇게나 걱정하고 있는데. 안 그래도 잔 상처가 많은 몸에 뭘 또 이런 걸 달고 오는거야. 꽤 넓게 퍼져 있는 멍을 쓸자니 몸을 일으킨 에릭이 조금 미안한 얼굴로 쳐다봐온다. 분명 자신은 아무렇지 않지만 '찰스가 걱정하니까' 저런 표정이라도 짓는 거겠지. 아니나 다를까...
"별 것 아냐. 조금 멍든 것 정도는."
그래, 자신은 찢기고 상처투성이가 되더라도 괜찮겠지. 만약 그게 나였다면 자잘한 생채기 하나도 그냥 넘기지 않았을 거면서. 찰스의 심술이 한 단계 상승했다. 분명히 조금 멍든 것 정도는 별 일 아니라고 했겠다.
여전히 뚱해보이는 찰스를 달래려는듯 에릭이 먼저 키스를 해온다. 평소 친애의 표시로 하는 볼키스도 인색한 편인 그로서는 꽤 적극적이며 애정을 담은 사과의 제스쳐였기에 찰스에게는 제가 에릭에게 약하다는 것을 재확인하게 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한껏 설왕설래하며 기분이 풀리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재개된 몸의 대화에서 에릭을 넘겨 우위를 점하며 찰스는 생각했다.
다음 날, 아침식사를 마치고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고 나온 에릭은 묘하게 애들이 자신과 시선을 마주치려 하지 않는 것을 느꼈다. 알렉스는 제 얼굴 언저리를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고개를 휙 돌리고 먼저 달려가버렸고, 션은 헉 소리가 나게 놀라더니 안절부절하다 알렉스 뒤를 꽁지가 빠져라 따라 뛰어갔다. 조금 늦게 나온 행크마저 새빨개져선 제 눈을 슬금슬금 피해 가버리니 그냥 넘기기엔 너무나도 이상했다. 그러고 나선 아침 훈련 내내 그 누구와도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딱히 아이들과 친해지려 하진 않았지만 이렇게 대놓고 피하는 것이 좋은 기분일리 없잖은가. 적당히 러닝을 끝낸 뒤 서류와 씨름하느라 나와보지도 못한 찰스가 있을 서재 대신 체력단련실을 찾았다. 한창 근육운동 중이던 레이븐이 에릭 쪽을 돌아보곤 고개를 갸웃하다 흡, 하는 소리와 함께 들고 있던 역기를 떨어뜨릴 뻔했다. 레이븐마저 모두와 비슷한 반응을 보이자 에릭은 눈썹을 한번 그었다.
"왜 그런 표정이지?"
"저, 에릭?"
"알렉스나 션, 행크도 다들 날 보더니 못 볼 걸 봤다는 표정으로 피하더군."
"어, 그러니까..."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레이븐은 조금 난감해졌다. 그 원흉이 제 오빠라는 것이 자명했으므로.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는 레이븐에게 에릭은 간단하게 한마디했다.
"말해."
레이븐은 긴 설명을 덧붙이는 것을 포기했다.
"음, 에릭. 그냥 거울을 봐."
그리고 잠시 후, 서재 쪽으로 달려가는 에릭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찰스? 잠깐 나 좀 보지."
평소와 다름없는 선량한 미소 속에 뭔가 다른 것이 비춰진 것 같은 느낌은, 에릭의 어림짐작만은 아니었으리라.
"왜 그러나 친구."
에릭은 책상 너머로 몸을 숙이며 으르렁댔다.
"이것, 자네 짓이잖아."
"그래. 색도 모양도 딱 보기 좋네만. 별/것/아/닌/ 멍자욱이지."
서슬 퍼렇게 설명을 요구하던 에릭이 푸쉬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물론 그 '멍'은 키스마크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하지만."
"그러니까...자네 말은.."
"아무렇지 않다고 한 건 자네였다네."
어이없다는 얼굴을 한 에릭에게, 찰스는 환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원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몇 개 더 만들어줄 수도 있는데, 어때? 당분간 그 트레이닝복을 입기는 그럴테니 부족한 운동분을 채워야 할 것 아닌가."
"타월이라도 두를 테니 걱정 마."
"오, 이런. 내게서 자네의 목덜미를 훔쳐보는 즐거움을 빼앗을 셈인가?"
"본인이 한 짓 덕분이니 원망 말아."
"멍을 달고 사는 것 같길래 한두 개 늘려준 건데 뭘 그러나."
"자꾸 그러면 나도 만들어 줄 거라고."
계속 이어지던 유치한 공방에 에릭이 최고점을 찍자 찰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양팔을 활짝 벌렸다.
"얼마든지. 그거 아나, 에릭? 그건 내 거라고 도장 찍는 것과 같은 행위라는 걸."
그 대사에 에릭은 입을 벌린 채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사이 책상 옆으로 돌아나와 에릭을 끌어안은 찰스는 제가 만든 키스마크에 입맞췄다.
"내가 남긴 자국을 남들 앞에서 드러내고 다녔다니 뭔가 짜릿한데."
"...kinky..."
"함부로 다쳐오는 자네가 나빠."
투정하듯 말하지만 걱정이 묻어나오는 한마디에 에릭이 눈을 깜박였다. 이런 찰스에겐 아무런 변명도 할 수 없었다.
"조심할게."
"응."
그래, 에릭. 널 걱정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기억해. 자신을 너무 무모하게 던지지 마. 내가, 옆에 있으니까.
찰스가 에릭을 안은 팔에 힘을 주자 뒤따르듯 두 개의 입술이 포개졌다. 평범한, 자비에 저택의 일상 풍경이었다.
+달달한 두 사람이 보고 싶었다고 한다. (먼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