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무와 임무 사이, 오랜만의 여유였다. 간만에 짬을 낸 벤지가 새로운 발명에 돌입한 평화로운 일상. 거기다 본의 아니게 이단을 조수로 부리는 호사가 덧붙여진 덕에 벤지는 몇 박 며칠 동안이나 머리를 싸매고 도는 중이었다. 알 수 없는 공식들과 정체 모를 기계 더미 속에서 보여주는 새로운 모습들에 감탄하며 이단은 벤지가 내려주는 미션들을 수행하고 있었고.
이번에 접수한 미션은 자료 찾기였다. 이단이 벤지의 집으로 들어오며 창고 구석으로 밀려난 책 더미 속에서 적확한 한 권을 찾는 게 1차, 그 안에서 딱 필요한 부분을 읊어주는 게 2차라고 할 수 있었다. 무규칙의 법칙 아래 책장 밖으로 줄 서 있는 책들 사이에서 목표를 찾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집 안에 놓여 있을 땐 아마도 정리가 좀 되어 있었을 텐데, 창고로 밀려나면서 죄 어그러진 듯했다. 그예 쌓인 먼지를 헤치며 온갖 잡동사니 틈바구니에 깊숙히 숨어있는 책을 찾는 데에는 그만큼 단련해 온 눈썰미가 아낌없이 쓰였다. 브랜트가 보면 재능 낭비도 이런 낭비가 없다고 하겠지만. 이단은 꽤나 즐기고 있었다. 사소한 행복은 언제나 자신의 손에 잘 잡히지 않는 것이었으므로 더욱. 뭘 만드는지 짐작도 가지 않지만 제 장기를 발휘할 수 있는 분야에 들어간 벤지가 신나하는 모습은 마음을 따듯하게 했다.
'오래 기다리게 할 수야 없지.'
미션이 끝나면 저녁 식사라는 중요한 이벤트를 준비해야 했기에, 이단의 마음은 조금 급해졌다. 잽싸게 훑어내리는 눈동자와 안내역인 손가락이 한동안 바쁘게 움직인 끝에, 이단은 목표하던 책을 끄집어냈다. 한 손으로 잡기 버거울 두께를 자랑하는 그것은 심지어 어떤 박스에 반쯤 꽂히다시피 파묻혀 있었다. 어찌됐든 첫 번째 고비는 넘긴 셈이다. 대(對)다족동물살상용무기로 적합해 보이는 책을 들고 이단은 벤지에게로 향했다. 손을 씻기 전에 폈다 검댕이 잔뜩 묻을까봐 최대한 살짝 잡은 모양새로.
"여기 있어."
이단의 목소리가 들리자 뭔가 조였다 풀었다 하며 뚝딱이던 벤지가 바로 고개를 뗐다. 그리고 이단이 내미는 것을 보고 반색을 했다. 역시 이단이라며 어쩜 이리 빨리 찾았냐는 말과 함께 받아들더니 휘리릭 넘기기 시작했다. 그 기세에 밀려 책장 사이로 작은 종잇장 하나가 팔랑이며 떨어졌다. 뭐 떨어졌다며 책에 열중한 벤지 대신 주워드는데, 갑자기 맹렬한 속도로 손이 튀어나와 채가는 것이 아닌가. 고개를 드니 엄청 당황한 얼굴로 종이조각을 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벤지?"
"어, 어."
"...그거, 뭐야?"
벤지는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봤을까?'
말을 잇지 못하고 우물쭈물 허둥대고 있자 이단이 고개를 갸웃했다.
'눈치챘을까?'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륵,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이윽고 벌어진 이단의 입에선...
"혹시, 전 애인이야?"
말과 동시에 벤지가 굳어버리자 이단은 작게 미소지었다. 아무래도 제가 풀어줘야 할 듯했다.
"오~ 미스터 던, 생각보다 엄청 얼굴 밝히네."
전 애인이냐고 짐작한 것에 비하면 산뜻하다 못해 장난을 거는 듯한 말투에 벤지는 입만 뻐끔거렸다. 아니 이걸 뭐라고 해야 하지.
"그런 미녀를 사귀었다니, 나로는 부족할 지도 모르겠네."
쩔쩔매던 벤지의 신경줄이 툭 하고 끊어졌다.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벌겋게 달아올라 아무 말도 못 하더니 갑자기 소리를 지르는 통에 이단은 깜짝 놀랐다. 거기에 더해 벤지는 그 종이조각을 이단의 눈앞에 들이댔다.
"잘 봐요, 이 사진...낯익지 않아요?"
"어? 잘 모르겠는데..."
부드럽게 물결치는 금발머리에 푸른 눈, 장밋빛 뺨에 붉은 입술까지. 가히 미녀의 정석이라 불러도 손색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살짝 흐릿하게 나온 것을 감안하더라도 제 인적데이터베이스에 이런 사람은 없었다.
알아보는 기색이 없자 벤지는 사진에 씌운 필름 같은 것을 벗겨냈다. 그 아래 나타난 배경에는 웬 남자가 찍혀 있었는데, 이를 본 이단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저 남자는 기억에 있었다. 그런데, 그럼 앞뒤가 안 맞았다. 알기로 그는 이미 10년쯤 전에 죽었다. 그 이전 사진이라고 해도, 일단 벤지의 신분에 남자와는 접점이 없었다. 거기다 대체 벤지가 왜 다른 남자랑 같이 있는 여자 사진을 갖고 있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설마...짝사랑인가.
이단이 미묘한 얼굴로 저와 사진을 번갈아 보자 벤지는 한숨을 내쉬었다. 홧김에 들이댄 게 잘못이었다. 그냥 적당히 좋아하던 여자라든가 변명할 것을 어쩌다...아니 그래도 그런 말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엎질러진 물, 여기까지 왔는데 설명을 안 할 수도 없고, 하자니 엄청나게 부끄러웠다. 그렇다고 뭔가 이상하게 가지를 치고 있는 듯한 이단의 상상을 그냥 둘 수는 더더욱 없었다. 이단으로서는 당연히 이해가 되지 않을 터였다. 저를 위해서라도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야 했다. 벤지는 심호흡을 했다.
"음, 그러니까 이단."
"응?"
"그녀는, 당신이에요."
이단의 눈동자가 말없이 커졌다. 듣고 보니 짐작가는 것이 하나 있었다. 저가 아직 애송이였을 때의 임무. 원래 투입되기로 했던 루시가 갑작스러운 부상으로 드레스와 구두 따위는 걸치지 못하게 된 상황에서, 고작 3일짜리 출장 임무에 다른 팀에서 누군가를 빌려올 수도 없어 울며 겨자 먹기로 낙점된 거였다. 여자 에이전트가 한 명만 더 있었어도 그럴 일은 없었을 텐데. 그리 큰 규모가 아닌 임무였기에 적당히 팀을 꾸린 팀장을 애꿎게 원망할 수도 없었다. 메이크업과 드레스업을 해주던 루시의 손길마다 휘파람을 불어대던 선배 요원들은 무시하고 거울 한번 힐끗거리지조차 않은 채 미션 장소에 들어갔던 터라 인상이 제대로 기억나질 않았지. 잠시 과거를 반추한 이단은 그래도 남아있는 이상한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벤지, 그럼 이 사진은 어디서 났어?"
벤지는 고개를 떨궜다. 사실을 알고나면 자신을 어떻게 볼지 무서울 지경이었다.
"그러니까, 그게..."
"응."
"간단히 말하자면, 끈질김의 승리랄까요."
집요하게...뭐? 놀라는 이단에게 벤지는 나름 차근차근 설명을 했다. 이단이 듣기에는 횡설수설 종합반쯤 되는 화법이었지만, 적당히 끊어내며 그 안에서 요점을 짚어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한마디로 이단 헌트의 과거 행적에 대해 알아보다 그 자신도 잊은 햇병아리 시절에 도달했고, 그중에 무려 여장이 있었다는 걸 알고 IMF는 물론이고 그 당시 파티 업체를 비롯해 오갔던 관련 인물까지 전부 탈탈 털었다는 거다. 저렇게 눙치고 있지만 보통 일이 아니었을 거다.
"왜, 그렇게까지...?"
무심결에 나온 말에 벤지의 얼굴이 터져버릴 것 같이 빨개졌다. 아니 왜 모르냐고요, 라고 소리칠 것 같은 자신을 다스리며 본 이단의 얼굴은 저 대사와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숨과도 같이 대답이 흘러나왔다.
"....좋아하니까요."
고개를 숙인 채라 벤지는 보지 못했지만. 천천히 손이 올라오더니 얼굴을 한번 쓸었다. 느릿느릿 내려오다 입가에 머물렀던 손이 떨어지자, 그 뺨에는 살짝 홍조가 돌았다.
"내가 그렇게 좋아?"
이번엔 참지 않았다.
"그래요! 당신이 여장을 한 적이 있다는 걸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대체 무슨 임무를 시키는 거야 정말...여튼 당시 팀 멤버를 찾아봐도 퇴사했거나, 내부 자료는 영 쓸모가 없고. 어떻게든 찾으려고 내가 얼마나..."
"난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어떻게 잊을 수가 있어요? 저렇게......예쁜데."
"난 그때 거울을 제대로 보지도 않았거든."
"저는 보자마자 숨이 멎을 뻔했는데요."
꿍얼대며 시선을 이단에게로 돌리자, 그는 일견 평소와 다르지 않음에도 미묘하게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이단 바라기 n년째인 저의 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부끄러워하는 이단이라니! 당장 사진을 찍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일단 제 눈에만 담기로 했다. 때로는 물질적인 컬렉션보다 감정적인 충만함이 필요하다며. 대신 두 팔을 뻗어 그 진귀한 모습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실은, 요즘도 때때로 그래요."
"...벤지."
"절대로! 부족하지 않아요. 당신이니까."
그러니까. 그냥 이렇게 내 옆에만 있어줘요.
속삭임은 이단의 입속으로 사라졌다.
+여장하고 출장...이라는 미션이었습니다. 아무리 잘생겼어도 50대 아저씨에게 시킬 일은 아닌거 같아서 머리를 쥐어짜ㅠ 급선회를....흐흑 너무 어려웠어요...역시 본투비소비러에게 연성은 넘나 힘든 길....교류전 때 보신 분은 알만한 그림(...)으로 할까하다.....죄송시려워서 끄적였는데 이게 더 나쁜거 같은....(먼바다)
++누군가 그려주시면 좋겠다...여장한 젊이단 엄청 이쁘겠죠...
+++팁님의 하해와 같은 은혜가 제 손에 도착하여 부랴부랴 힘을 냈습니다. 몇 줄 쓰다 말다 미적대고 있었는데 역시 뭔가 당근과 채찍질이 오지 않으면 진도가 안 나가나봐요...흐흑 팁님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