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리야] NAME

잡동사니 2016. 8. 30. 18:33

 일리야 쿠리야킨.”


갑자기 불리운 제 풀네임에 미동도 않고 있던 금발머리가 책에서 얼굴을 뗐다. 왜냐고 묻는 시선에 당황이 섞인 것을 잡아내며 생각을 말로 읊었다.


 내 이름, 알고 있어?”

 요원 프로필이라면 숙지하고 있다.”

 그럼, 불러 봐.”

 뭐를.”

 내 이름. 그러고 보니 자네와는 이름을 부른 적이 없는 것 같군.”

 카우보이 ?”

 “Nope. 그건 이름이 아니잖나. 방금 한 말과는 다른데.”


무슨 꿍꿍이냐, 뭐 잘못 먹었냐, 지금 들고 있는 술잔에 약이라도 탄 거냐고 말없이 표현하는 그를, 이렇게나 읽기 쉬워진 건 아무래도 그만큼 가까워진 탓이려나. 생각하면서도 왠지 서글퍼졌다. 그리고 그만큼 승부욕이 발동했다.


 애칭으로 시작한 사이니 슬슬 이름을 부르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푸른 눈동자가 데굴데굴 굴렀다.


 애칭은 개뿔. 시답잖은 말이나 하려거든 가서 잠이나 자.”


퉁명스럽게 작은 흔들림을 감추고 책으로 피해 버리는 그 모습에 솔로는 홀짝이던 위스키 잔을 내려놨다. 아무래도 이런 식으로 나오면 더 듣고 싶어지는 법이지. 그걸 아직도 모르는 건가. 입꼬리가 살짝 위로 휘는 동시에 빈 오른손이 날쌔게 움직였다. 다시 몇 글자 읽지도 못한 책이 나꿔채지자 일리야가 눈썹을 그었다.


 뭐야.”

 대화를 하다 말고 책이나 읽는 건 예의가 아니지.”

 시시한 소리에 일일이 답할 의무 따윈 없어.”

 시시하다니. 관계에 있어 호칭이 갖는 의미가 얼마나 큰지 모르나.”


그 말에 일리야의 고개가 부자연스럽게 돌아갔다. 편안해 보이던 어깨에도 왠지 힘이 들어간 것 같은데. 저 품새는 아무래도


 뭘 그렇게 부끄러워하는 거야.”

 !”


발끈해서 대꾸하지만 그게 화가 난 것이 아니란 것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별것도 아닌 걸로 귀찮게 하지 말고 책이나 돌려 달라 구시렁대는 일리야 바로 옆으로 자리를 바꿨다. 주인과 이별한 작은 문고본은 제가 들고 있던 잔 근처에 놓여졌다. 평소라면 이것 가지고도 한참 재미를 볼 법하지지금은 더 급한 게 있으니까.


 별것 아니라면 그냥 불러주면 되잖아.”

입술을 꾹 다문 채 딴청을 피우는 모습에 솔로는 속으로 웃었다. 이 커다란 남자는 의외로 애 같은 짓을 잘한다. 그게 밉지가 않은 게 또 신기한 점이지. 비어져 나오려는 웃음을 갈무리하며 짧게 통보했다.


 흐음. 안되겠네. ‘일리야에게 물어 보는 수밖에.”


다물린 입술이 열린 것은 순식간이었다.


 !”


일리야에게는 불행히도, 그는 소파에 길게 누워 책을 읽고 있었다. 휴식 모드에 들어가 늘어져 있던 허리께에 앉은 솔로는 그가 미처 상체를 세우기도 전에 손을 휘젓는 게 고작이었다- 자물쇠 해제의 고수다운 솜씨를 선보였다. 그리고 얌전히 누워 있는 일리야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은은한 알코올 향이 섞인 따뜻한 숨결이 쏟아지자 갑자기 외부로 불려나온 일리야는 생각보다 빠르게 반응했다. , 그것은 세상에 다시없을 만치 달콤한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일리야를 불러댄 솔로 때문이기도 했다. 다정한 어조에 실린 것이 무엇이든 제 이름을, 그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일리야는 좋다는데.”

 누가!”

 좋은 게 아니라면 이렇게 열렬하게 반응할 리 없지 않나.”


빙긋 웃으며 말하는 솔로의 눈짓을 따라 가니 그새 반쯤 일어서 까딱이는 모습이 보였다. 마치 고개를 끄덕이는 것 같아 보이는 통에 일리야의 입은 더욱 굳게 다물어졌다. 한곳으로 몰리던 혈류량을 나누기라도 하려는 듯 빨개지는 얼굴이 솔로를 조금 더 부추겼다. , 애초에 이 정도로 항복할 거라곤 생각지도 않았지만.


 한번 하고 나면 쉽다니까 말이지.”

무슨 짓이냐며 푸들거리는 몸을 가볍게 누른 솔로가 다시 혀를 굴리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보다 더 부드럽게 일리야를 향하는 혓바닥에 일리야는 흠칫흠칫 떨었다. 차마 아니라고는 말 못하는 그를 보며 솔로는 웃었다. 잔 떨림이 솔로에게서 일리야로, 다시 솔로에게로 전해졌다. 참을 수 없어진 일리야가 애처로운 목소리로 그만이라 하건 말건 솔로는 한마디만을 원했다. 그에게는 장난이 장난만으로 끝나는 일이 없었다. 어느 순간 진심이 되어버리는 것은 다 그 탓이라고 돌리며 솔로는 계속 입을 놀렸다. 그렇게 일리야를 압박하고, 달래고, 어르며 몰아갔다. 그 끝에서, 일리야는 결국 토정했다. 한숨처럼 내뱉어진 이름자에 솔로는 고개를 들었다. 위아래로 움직인 목울대가 후끈거렸다. 평소보다 낮은 톤이 되어 발화한 목소리는 다행히 떨리진 않았다.


 일리야.”

 넌 정말 나쁜 놈이야. 폴레옹.”

 .”

 ……

 . 일리야.”


그러니까 이름을 불러 줘. 그런 나를 잊지 못하도록.

언제까지라도.




+케링님 드린 축전이었습니다.




다음은 당신이 될지 모릅니다!